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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아도 팔자가 다르다는 것쯤은 다들 알겠지?
그리고 그 다른 팔자인 인간이 내 옆에 있을 때 가끔 혹은 자주 열받는다는 것도 인정?
어제 나는 매우 바빴음.
대부분 나는 일년 내내 바쁜 인생을 살고 있고
워낙 어려서 부터 그런 삶을 살아왔기에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 릴렉스 하거나 이런걸 할 줄 모름.
그런 나를 보고 같이 사는 인간은
'세상 인생 빡세게 사는 여자'라고 혀를 차고
빡세게 살지 않는 그를 나는
'세상 게으른 자'라고 서로 쌍손가락질 하는 편.
그 게으른 자는 같이 바쁘지도 않은 주제에
내가 바쁜 것에 불만을 표하는 그런 기가차는 언사도 일삼아.
내가 하도 혼자 분주해서 본인을 불안하게 만든다나?
말이냐, 똥이냐
어쩄건 나의 어제는 별반 다를 바 없이 바빴고
게으른 자는 하루종일 한 거라곤 문고리 달았다 뗐다 그리고 다시 단 것 하나
이백살 장수의 꿈을 이루기 위한 얄궂은 자체 제조 건강쥬스 마시고
반경 1미터 내의 인간들을 생화학 테러한 것.
오후 4시 반,
꼬마가 하교함.
항상 거르지 않고 갖는 그녀의 간식타임
옆에 걸터 앉아 애비 흉을 보기 시작함.
"너네 아빠 하루종일 한 거라곤 문고리 똈다 달았다 뗐다 달았다 한거 밖에 없는거 알아?"
-그래? 그냥 달기만 하면 되는건데 왜 뗐다 달았다 했대?
"모르냐, 너네 아빠를?
뭐든 한 번에 말끔하게 해내는 적이 없으니 그렇지.
내가 진짜 답답해서 미침"
-흠... 어차피 그래봤자 고생한 건 아빠 본인인데 엄마가 왜 답답해 미치는걸까?
"아니 답답한게 맞잖아.
빨리 끝내고 다른 생산적인 일도 할 수 있는데 안 그래?"
이 정치적인 것은 한방에 내 편을 들어주는 적이 없지만
내 베프 오디가 얘보다 늦게 하교 하기 때문에 종종 얘가 단독으로 내 하소연을 듣게 됨.
오물 오물
쫍쫍
야무지게 도넛과 우유를 섭취하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음.
-그냥 인정해.
그러니까 엄마는 지금 아빠가 일처리가 늦어 답답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엄마는 피곤할 정도로 일 많이 하는데
아빠는 꼴랑 그 문고리 갖고 하루 종일 세월 보낸게 억울한 거 아냐?
헉...
족집게...
맞지.
결국 내가 짜증이 난 이유는 바로 그 팔자의 불공평성이겠지...
나는 또 굳이 아니라고 비겁하게 부정하는 타입은 아님.
"맞아.
아니 사실 불공평하지 않아? 왜 나만 맨날 피곤하고 하는 일이 많은 거야! 안 그래?"
또 다시 생각에 잠시 잠긴 아이는
오물오물
쫍쫍
-속이 좀 풀릴 솔루션을 줄까?
"오! 있어?
네네네! 주세용"
딸인데 갑자기 공손해짐.
-응, 그거 알지?
오늘 1학기 마무리 선생 면담 있잖아.
저녁 6시 반에...
날도 춥고
엄마 원래 학교 가는거 엄청 싫어 하잖아.
귀찮게 화장도 해야 하고...
그냥 아빠 혼자 가라 해.
어차피 부모 둘 다 열정적으로 오는 사람들 없어
대부분 한 명만 와.
오!! 굿 아이디어 아니겠나?
진짜 가기 싫었었음.
프랑스 사람들 별 것 아닌 말 진짜 늘려서 하는 재주 오지고
약속 시간 절대 안 지키고
앞의 학생들 마다 시간 오버하면 말이 6시 반 면담이지 7시반 개런티임.
갑자기 할명수 한 박스 들이킨 기분.
그래야겠다.
남자 혼자 보내야지.
그러면 오늘 하루 종일 느꼈던 팔자의 불공평성을 조금은 잊을 수 있겠음.
쓰레기 버리고 온 남자를 상냥하게 불렀음.
"면담 말야,
혼자 가!
나 피곤해"
맨날 샴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게 습관이 된 남자는 짐짓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박할수도 없음.
어엿한 어른으로서 혼자 가도 될 일이니까.
그렇게 남자는 매우 가기 싫다는 의사를 온 몸으로 꾸역꾸역 표현하면서
아주 느리게 신발을 신고
세 배속 느리게 패딩을 걸치고 집을 겨우 떠났는데
남자가 대문을 닫자
꼬마가 씩 웃으면서 하는 말
"좀 더 좋은 소식 알려줘?
우리 선생 댑다 말 많아 ㅋㅋㅋ"
복음이로세.
남자는 어제 면담 마치고 아홉시에 귀가함.
생전 안 하던 야근을 하고 매우 피곤한 면상으로...